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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덕's 두뇌활동
이 나이쯤되니 나를 좋게만 봐주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다는걸 알게된다 그래서 이전에는 크게 관심을 갖고있지 않았던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루즈하게만 느껴지거나 어렵게만 느껴지던 대상들이 나에게 뿜어내는 호감은 지친 나를 위로해주곤 한다. 반대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 역시 다시 하게되는 경우가 있다 개인의 성향이 개발 되지 않았을 시절 인연을 맺어둔 사람들을 다시금 분류한다는게 유쾌한건 아니지만 상대의 생각을 보고 적절한 가면을 쓰지 않을 정도의 인내심은 내게는 없는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좋은 점은 이런 사람들의 관계가 정리되는것에대한 아픔이 무뎌지는거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가정하고 행동하며 기대했던 어린날보다는 지금의 적당한 가면속에서 흘러가는 내가 더 나답다..
나를 바라보지않고 나를 블러처리하듯 흐르는 그날의 대화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변으로 인해서 나쁘던 그날의 기분을 나 스스로인게 문제라던 너의 사과를 아프게 받아들이는 나는 가치없는 사람이다. 가루처럼 흩뿌려지고 바닥에 스며 보이지않게되고싶은 오늘이다.
중학교 1학년때 영어와 수학을 배우기위해 학원을 다니고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9시에서 10시정도가 되었던걸로 기억한다. 학원의 위치는 원룸 투룸의 형태가 모여있는 주택지역이었고 학원 또한 그런 다세대 주택의 2층에 위치되어있었다. 당시 나는 집에서 멀지않은 거리였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문제의 그날에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학원을 갔었다. 수업이 끝나고 내려와 자전거 자물쇠를 여는데 앞 건물 반지하 층에서 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봐 ㅋㅋ 야 이리와보라고" 라는 식의 여자아이 목소리였다. 나를 부르는건가 하고 약간의 공포심을 느끼며 그대로 멈춰있었는데 다시금 "야 여기 보라고 야.."하면서 낮게 목소리를 까는 누군가에게 겁먹지않은걸 보여주고자 반지하 층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밑을 쳐다봣을때 나는 심장이 멈..
알파메일과 가장 관련이 없던 친구는 오랫동안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의 결실로 좋은 직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는 자신의 위치와 자격조건이 어떤지를 자꾸 확인하고 싶어했다. 작든 크든 대화나 행동으로 보건데 그 친구는 자신의 조건을 만족하기 보다는 자신이 조건을 갖추기 전의 세상에 보상을 받으려는듯 행동했다. 친구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전반부의 인생보다 긴 후반부의 인생에서 성공한게 크다" 인데 막상 친구는 자신의 취약했던 전반부의 인생에 집중한듯 보인다. 그 시절 자신을 무시 했거나 무시 당한 듯 했던 사람을 공격하거나 여성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지금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그 여성이 자신을 사랑할것인가 사랑하지않을것인가 등의 문제 말이다. 가까운 친구로서 관련된 주제의 대화일때 옆에 자리할때..
나는 양평에있는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다. 군생활중 가끔 주어지는 꿀맛같은 휴가나 외박시에는 항상 양평 읍내에 들러야만 했다. 내 시절에 군생활을 겪은 사람들의 생각이 다 비슷할거라고 생각하지만 부대 밖으로 나간 군인들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정할 수 없는 위치에서 오는 위축, 합리를 따질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위축, 잘못한 것이 있다는 전제에 놓인 자의 위축등을 짊어지고있다. 나의 경우 휴가 복귀후 느낄 정신적인 고통이 두려워 신병휴가 이후 상병이 될때까지 휴가를 안나가고 버티고있었다. 그 중간중간 꿀맛같은 외박을써서 위수지역이였던 양평 읍내에 나가곤 했었는데 그때의 불합리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외박은 당시 부대가 한가한 주말에 쓸수있었고 그 마저도 국방력 보존을 위한 병력을 남겨야했..
결혼을 앞두고 나의 그대를 왜 사랑하냐는 질문을 몇 차례 받고있다. 반복되는 질문에도 나의 머릿속에서 매번 떠오르는 장면이있다. 과탑을 보러가지 않겠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덥지않은 대화가 오가면서 땀을 흘리며 갔던 기숙사 식당은 2층 높이의 언덕에 있었고 계단을 오르기전 계단위의 과탑을 발견했다. 친구는 큰소리로 " 야 과탑! 구경하러 왔어!" 라고 외쳤고 우리를 발견한 과탑은 볼이 빨갛게 물들었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여름이었다.
이정도면 죽어도 되겠다는 적당한 생각을 하며 스스로 우울하다기보다 충만한 삶에 미련없다는 망상을 했었다. 지나온 그날을 생각하면 정말 아팠구나 라는 생각만 든다 나로 인해 아팠을 그들을 위해 미안하고 감사하다
나를 충만하게 하는 삶을 만들어가고있다. 매일 10분이상의 운동을 하기위해 노력하고 내가 사는 곳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자전거를 타고 직접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껴보려 책을 보고 80년대의 히트곡과 90년대 히트곡을 탐닉하며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고있다. 어느것 하나 나를 불타게 하는게 없지만 이것들 하나하나를 진행하다면 만족감에 웃음짓는다.
라는 말을 당해보니 마음이 헛헛하다. 사이다라는 좋은 대의명분아래 못하는 말따위는 없어진 지금의 세태가 서글퍼진다. 나는 그대에게 "해줘도 욕먹을거 안해주고 욕먹어야지"라는 생각을 감히하지 않는데 당신은 그렇게나 가볍고 쉽게 나한테 그런 말을 내뱉을수있을까 하루가 무겁고 지겹구나
초등학교때 나는 몰랐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당시의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못사는 동네였다고 한다. 초등학교때 한 접시에 500원 하던 떡볶이가 같은 시기 다른 동네에서는 컵볶이라며 한컵에 300원에 판매중이였으며 핫도그는 300원이던게 천원정도했었다. 초등학교때 급식비 낼 형편이 안되는 친구들 손들라고하면 한반에 30명 정도되던 우리반 친구들중 절반정도가 손을 들었고 아침 조회시간 전체를 할애하여 급식지원 접수를 받았었다. 점심 급식이 끝나고 남은 흔히 생각하는 맛없는 반찬을 식기비늘에 정성껏 싸서 하교길에 들고가던 친구들의 모습도 흔했다. 그 중에서도 정말 집이 힘들었던 친구가 기억난다. 그 친구의 집은 2층짜리 주택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 외벽쪽으로 초등학생이였던 나의 몸을 45도로 돌려야 들어갈수..